담임목사 컬럼


함께 걷는 사순절 편지(30)

[무의식의 자동성]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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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대학교의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timothy Wilson 은 그의 중요한 저서 <내 안의 낯선 나 Strangers to Ourselves > 에서 무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하루에 하는 일의 약 5%만이 빙산의 일각위에 있는 그 눈덩이 - 즉 빙산의 일각도 아니고 그 일각위의 눈덩이 정도- 만큼만이 인간의 의식으로 처리된 의식적.의도적 선택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95% 정도의 행동과 행위는(그러니까 거의 밖으로 보이는 우리들의 행동과 모양을 망라하는) 이미 습득되어 있는 ‘무의식적 방식’으로 처리 된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정리하자면 사람의 거의 모든 행동은(말을 포함해서) 이미 과거의 어떠한 경험이나 습득의 기회를 통해서 습득되어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즉각적인 반응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전 편지에서 말씀드렸듯 이것을 모국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 하셔도 좋을 듯싶습니다. 무의식적 습관을 이 학자는 <자동성>이라고도 부릅니다. 고대 철학자는 이것을 <제 2의 천성>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차 운전을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좀 더 이해가 되기 쉽습니다. 운전을 할 때 나는 의식의 처리 과정을 거쳐 백미러를 보고 사이드미러를 보는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차량의 거울을 통해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는가? 전자면 초보일 터이고 후자면 어느 정도 운전경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우리의 신앙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을 인지하고 삶의 자리를 돌아 볼 때에 <의식적인 처리>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동성>이 발휘되어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양 가운데 잘 운전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 바로 장성한 또는 성장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준 또는 하나님을 통해 배운 것들이 자동적인(무의식) 기준이 되고 표현이 되기 위해선 부단히 그 안에 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노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타국의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그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고난 주간을 살아가며 얻게 되는 것은 당장의 유익이 아니라 이 환경 안에 거하면서 자꾸 의식하며 그 의식이 우리의 무의식에 되어 자동성을 가지고 습관이 되고 인격의 표현이 되도록 하는 것이 고난주간을 보내는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에 자꾸 노출되고 기도의 자리에 자꾸 자아가 노출이 되고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일 안에 자주 노출될 때 결국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나의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되고 그것이 우리들의 95%의 행동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쌓이고 쌓일 때 바로 성경의 말씀대로 금.은.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불로도 태울 수 없는 집을 짓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들!! 이것이 초보적인 의식의 단계에서 점점 무의식의 자동성을 가지고 금.은.보석의 집을 잘 짓도록 우리 서로 도우며 자라납시다.

 

이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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