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함께 걷는 봄 길 편지(19)

[동물원 단상]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 7:1-2)

 

제가 즐겨 찾고 읽게 되는 작가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동물원에 자주 갔다. 동물들 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동물들을 좋아했다. 말을 건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동물들 쪽에서 본다면 내 생각은 틀렸기가 십상일 터이다. 그러므로 동물을 향한 나의 갈증은 순전히 짝사랑이고, 동물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나 자신만의 몽상이라 해도 할 수 없다.> -김훈/ 연필로 쓰기

책을 읽다가 역시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돈은 넉넉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거 보여 주어야 했던 시절 종종 갔던 곳이 ‘서울대공원’ 이었습니다. 입구에 있는 다리가 긴 새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동물들을 구경하다가 공원의 맨 위쪽에 있는 호랑이를 구경하는 것으로 공원구경을 마치곤 했습니다.

사실 돈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내 자신이 더 동물들을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구태여 말을 섞어 이해를 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일방적이긴 했지만 그 거대한 동물들도 구경꾼의 입장에선 얼마든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근간에 동물원은 잘 가지 않습니다. 이런 일방적인 이해와 소통의 방식이 내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멘트 우리에 갇혀 사는 그들을 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 대상을 잘 알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섬뜩해 지기도 했고 일방통행의 소통의 구조가 답답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답답함은 인간 문명이 필연적 폭력성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이해하면 상대방도 이해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며 삽니다. 그래서 나의 이해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편입니다. 그 이해는 곧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이해는 위험합니다. 소통이 없는 이해, 쌍방 통행이 되지 않는 이해는 많은 오류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 오류로 인한 폐해들을 사람의 삶 가운데 겪지 않도록 미리 단단히 일러 두셨습니다.

그러니 잘 안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외워야 할 것은 외우고 이를 강제적으로라도 적용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