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 ‘왜?’ 라고 물을 수 없는 "(길 위에 쓴 편지 15)

[‘?’ 라고 물을 수 없는]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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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에게 왜, 하늘을 나는가? 라고 묻지 않는다. '풍년마을' 뒤 ,홍도평 10/22)

 

17세기 독일 시인인 앙겔루스 실레시우스 (Angelus Silesius)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장미는 ‘왜’가 없다; 장미는 단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looms simply because it blooms)이다.> 라고..

 

‘왜?’ 라는 단어는 ‘합리적 추론’을 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질문법입니다. 우리는 ‘왜?’ 라는 단어가 붙은 질문을 받으면 그러한 질문을 한 사람의 이해를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왜, 그 때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

“왜, 그 자리에 오지 않았어?”

“왜, 교회를 다녀?”

 

그러나 오늘 시인은 ‘장미에게는 왜? 가 없다’ 는 말을 통해 때론 삶의 많은 부분들이 모두 ‘왜?’ 라는 말에 응답할 수 없는, 즉 어떤 <합리적인 추론> 그 이상의 것들이 우리이 인생엔 더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장미에게 ‘왜?’ 라고 묻지 말라”

 

그리고 자신의 존재도 그렇게 <합리적 추론>의 너머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겠지요.

 

“왜, 사는 가?”

“왜, 사랑을 하는가?”

 

더 나아가

 

“왜, 신을 믿는가?”

“왜,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그렇게 헌신하는가?”

 

여기서 더 나아가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피조물인 사람을 위해 죽으셨는가?”

 

라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시인의 <장미에겐 왜 가 없다>라는 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장미는 단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처럼.

 

‘왜, 사랑하는 가?’

‘왜, 사는가?’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 하는가?’

 

라는 말엔 사실 왜? 라는 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억지로 가져다 붙일 순 있어도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 안에는 ‘왜?’ 라는 말을 찾기 보다는 일어난 신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태도가 더 요청됩니다.

 

<왜, 사랑하는 가?> 라기 보다는 ‘사랑하니’ 그 사랑이 더 치열하고 뜨거우며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기까지 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합리적 추론’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평화의 마음입니다.

 

이 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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