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


함께 걷는 사순절 편지(12)

[너는 알지 못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4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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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叢書)라 함은 일정하게 통일된 형식이나 체계로 간행된 같은 종류의 서적들의 모음을 말합니다. 메이저 출판사들은 어떠한 분야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역사든지 이러한 총서를 발행함으로 출판사의 역량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총서들이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프랑스 대학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크세주’ 문고를 첫 손가락에 꼽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백과사전적 지식을 항목별로 담고 있는 이 총서는 현재 3천 표제를 훨씬 웃도는 책이 4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고 일부는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백과문고’라 할 정도며 이 시대의 학술을 대표하는 기본지식의 저장고지요.

그런데 이 총서의 제목이 ‘크세주’입니다. 의미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뜻인데, 책의 내용은 시대의 학술을 망라하는 지식을 담고 있지만 정작 제목은 아주 회의적인 관점에서 “내가 뭘 알고 있는가?” 라는 의미의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 말은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가져온 말이라고 합니다. ‘몽테뉴’는 이 말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을 말하고자 했고 지식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특히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의심해 보자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 개인이 배워왔거나 가진 지식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의심하는 것, 즉 자신에 대한 의심이 참된 지식에 대한 합당한 태도이고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아주 오래전 실제 신문 칼럼에 나온 내용인데 유학시절에 사귄 미국인 의사가 한국을 방문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 인삼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 미국인 의사가 제 나라에 돌아가서 인삼을 분석했더니 치료나 건강 유지에 특별히 유효한 성분이 없다는 편지를 한국인 친구에게, 즉 칼럼을 쓴 사람에게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인삼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은 ‘미신’이다 라는 글을 신문에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삼으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의 증언을 알고 있고 또는 현재 과학에서 인삼이 유효한 성분을 많이 분석해 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의사가 정확하게 인삼성분을 분석하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함께 나눌 성경말씀은 “알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태도를 지적하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태도가 어떠했을까요? 바로 앞 구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사 40:27)

즉 하나님은 내 사정도 모르시는 분! 내 정당한 권리 하나도 지켜주지 않으시는 분! 이라는 자신의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자 했던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아직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내 사정도 모르시는 것 같고 내 권리를 지켜주지 않으시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 이시라고.

내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은 곧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게 하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이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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