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꽃은 잎으로 다시 살아

사도행전 4:5-12

봄기운 가득한 주일 아침, 이 예배의 자리에서 주의 영광 안에 계신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기도: 오늘 함께 나누는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세워나가는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시인 신동엽은 4월을 “갈아엎는 달”이고 “일어서는 달”이라고 했다. 교회 앞 산책길의 벚꽃이 모두 진 모습을 보면서, 갈아엎고 일어선다는 것은 비록 보기에 좋은 꽃잎이 떨어졌지만, 왕성한 생명의 기운으로 바뀌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꽃이 사시사철 달려 있다면, 그게 무슨 감흥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 4월을 갈아엎는 달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일어서는 달이어야 한다. 꽃이 길바닥에 떨어지고 수로에 떨어지는 것은 꽃의 입장에선 어떻게 보면 죽음이지만, 그러나 나무라는 전체적인 그림에서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변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꽃이 버티는 한, 열매는 없고, 4월에 부활절이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시간으로!! 다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 부활 절기에 더 깊이 묵상하길 바란다.

이런 말씀을 드리며 말씀을 시작하는 것은 지난 주중 한 가지 일을 경험해서이다. 우리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도 가졌던 경기도 일영의 “감리교 연수원” 에서 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그 세미나에 참석한 친구인 동기 목사 한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수요일 오전에 들었다. 그 친구가 참여한 세미나 제목이 <설교자의 글쓰기>라는 세미나였는데... 그 친구는 쓰러지기 전날, 페이스북에 “배운 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라고 세미나에 참여한 느낌을 짧을 글로 올리기도 했다. 목사는 ‘설교’와 ‘글쓰기’에 대한 참으로 큰 무게감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데, 그 친구도 아마 그런 짊어진 무게감을 배움을 통해 좀 덜어보고자 아마 2박3일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재미있는 배움이 있는 시간. 아침 산책길에 쓰러졌고 ‘은평성모병원’에 급히 옮겼졌다..., 그 소식은 신학교 동기 단톡방에 알려졌고, 그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목요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새벽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톡방에 올라와 있었다.

목요일 아침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보다 건강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틈틈이 스쿼트도 하면서 운동도 열심히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왜 친구목사의 심장 근육은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을 포기했을까? 하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심장은 거의 일초에 한 번씩 움직이면서도 자신이 전여 느끼지 못하고 또 의식하지 못하게 조용히 계속 움직이며 사람의 생명을 유지 시키고 있다. 그 움직임은 사람의 의지와 나의 어떤 느낌과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결국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영역은 내 의식의지그리고 생각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신앙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을 것이 산책로에서 볼 수 있는 4월의 지는 꽃잎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겠지만, 생명의 나무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또한 우리의 의식밖에 있는 어떤 새로운 생명의 변화, 즉 부활의 역사 안에 있는 진행형 안에 있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의식하면 그 죽음의 고통과 상실. 마음의 찌르는 듯한 아픔에서 그나마 좀 견뎌내고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친구 목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하게 되었다.

“그래, 꽃은 죽는 게 아니라, 잎으로 살아나는 거야.....”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라는 사실적인 역사가 (지난 주에 부활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지를 말씀드렸는데) 이러한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새로운 생명의 역사들을 지어내는가를 볼 수 있게 된다. “꽃은 죽는게 아니라, 잎으로 다시 사는 것” 을 보여주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이다.

오늘 <행>의 말씀은 재판을 받는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 이다. 지금 한 가난한 어촌의 어부였던 베드로를 심문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대제사장 안나스, 가바야, 요한, 알렉산더 같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당시 유대사회의 가장 유력자들입니다. 어쩌면 갈릴리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얼굴조차 대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로마당국을 움직여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던 그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지금 서슬퍼런 권력을 가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베드로를 추궁하고 있다.

우리는 베드로의 과거를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 도망친 사람. 베드로의 인생은 한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그 전의 베드로와 그 이후의 베드로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주님의 부활사건이다. 주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 그는 “꽃은 바닥에 떨어져 처연하게 죽는 거구나..”“ 하는 것만을 알았던 그였다. 그러기에 그는 권력자들의 서슬퍼런 권위앞에 움추러 들었고, 작은 여종의 질문에 세 번이나 극구 주 예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주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신도 이렇게 땅바닥에 내쳐진 꽃잎이 될 것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의 부활사건이후, 베드로는 “꽃은 죽는 게 아니라, 잎으로 살아나는 거야.....”를 보았고 깨달았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달라졌다. 외형적으론 달라진게 없다. 여린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던 그 베드로 동일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증거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부활할 것을 믿게 되었을 때, 그는 달라진 사람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문이 그에게 열렸다. 당대의 세력가들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해서, 너를 흔들어 땅바닥에 처 넣을 거야 하고 위협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갈릴리 깡촌의 가난한 어부는 주눅 들지 않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ppt-1 (사도행전4:10-11)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과연 그는 부활사건 전에는 전혀 예수님을 몰랐는가? 꼭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수제자였고, 누구보다 예수님의 행적과 행하신 일들을 다 보고 알았던 사람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어쫓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 보았다. 심지어는 남의 일이 아니라,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자신의 장모를 살려내신 주님을 보지 않았는가? 결정적으론, 이런 일도 우리는 있었음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 그 때 여타 제자들은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이 예언자들이 한 분이라고 합니다.. ” 라고 대답할 때, 베드로는 이렇게 답하지 않았는가?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정확하게 자신을 아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이러한 상급을 주신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천국의 열쇠를 가지게 된 사람이 바로 베드로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부활사건 전의 베드로이다. 결과적으론 그러한 모든 기적을 다 보았지만, 그저 그 기적에 놀랍고 신기하게 여긴 사람이었고, 꽃은 땅에 떨어져 죽는 거야 라는 원리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가둔 단단한 벽을 가르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주님의 부활이다. 그 부활을 보고 믿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꽃은 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잎으로 사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니,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사람. 이 세상 어떤 권력앞에 주눅들 필요가 없이,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 라고 고발하며 세상에 주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일어선 사람이 되었다. 완전하게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가 그렇게 다시 일어섰듯이, 우리가 부활을 믿고 부활신앙안에 있다면, 우리도 역시 베드로와 같이 다신 선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세 번 늙는다.’ 는 연구논문이 발표된 적이 있다. 과학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2019년 발표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논문이다. 즉 노화라는 것은 평생에 걸쳐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의 급진적인 노화 시기가 있다는 것인데 논문에 따르면, 34살, 60살, 78살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몸 안에서 노화 변속 기어가 세 번 작동하는 셈이다. 제가 올해 60살인데. 노화의 두 번 째 기어 변속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환갑이 과학적 근거가 있긴 합니다. 과학적 근거로는 혈액에서 혈장을 분리한 뒤, 3000가지의 혈장 단백질을 분석했고 그 결과 이 세 번의 시기에 이 단백질의 수치가 급격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세 번 성숙해지는 기회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런 것 같다. 천방지축 망나니 같았던 저도 한 34살쯤 되어, 어떤 목회자로서의 계기가 있었고, 기어변속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저는 이 노화의 두 번째, 60에 서서 또 다른 영적성숙의 두 번째 기어 변속이 일어나길 기도하고 있다. 세 번째 변속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은총을 베푸신다면, 그렇게 성숙한 노인으로 세 번째 기어변속을 이루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는 미국 주식시장의 격언이 있다. 주요 커피 생산국 브라질에서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리면 커피 생산량이 늘어나 원두 가격이 낮아지면서 스타벅스의 이익이 증가한다는 얘기다. 서로 무관한 상황이 실제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나비효과를 설명할 때도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계기를 주시고, 일을 주시고 환경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릴 향하신 주님의 이끄심을 알게 되길 기도하셔야 한다. 세 번에 걸쳐 몸에 노화가 일어날 때, 때론, 꽃잎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때론 견디기 힘든 아픔을 마주할 때, 우리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함께 마주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와 계획, 부르신 자들이 넘어선 채로 있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달라진 베드로와 같이, “꽃은 죽는게 아니고 잎으로 다신 사는 거야”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 정리,

부활 절 네 번 째 주일, 혹 삶의 어떤 문제로 주저앉으신 분들. 마음이 무너진 분들. 다신 주님 앞에서 일어선 자들이 되어. “세상은 나를 버리지만, 하나님은 나를 세워 모퉁이 돌로 삼으십니다. ”라고 담대히 말하는 오늘의 베드로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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