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함께 걷는 사순절 편지(26)

[보건소가 어디예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

 

결혼 후 제 인생의 시간에서 이제 김포가 제일 오랫동안 살고 있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햇수로 16년이니 말입니다. 김포 토박이는 아니지만 이제 예전 논과 밭들로 이어진 풍무동의 옛 모습이 추억되기도 하며 신도시의 없어진 산들이 드문드문 기억이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제게 만일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사우동의 길을 묻습니다. “김포대로 926번 길이 어디입니까?” 그러나 저는 이런 말에 대답을 해 줄 수 없습니다. 사우동 길과 골목을 훤히 다 꿰고 있기는 하지만 “김포대로 926번 길이 저기입니다.”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사우동 북변동 골목길들을 알고 있는 것은 그렇게 지도상의 지식이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 커다란 풍경으로 인식되어 있는 지도이지 <몇 번 무슨 길>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나가던 사람이 제게 “금파초등학교는 어딥니까?” 라든지 “보건소가 어딥니까?” 라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고 또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보건소가 ‘무슨 길 몇 번지’ 인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인 풍경 안에서 그 위치의 방향과 도로가 머릿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우동과 북변동의 길을 그렇게 배우고 익혔습니다. 따로 배우려 하진 않았고 아예 배운다는 의식조차 못하게 그 안에서 <살다>보니 그렇게 길들이 내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는 것이란 어떤 방식일까요? 기독교 신앙을 잘 ‘배운다’는 것도 어떤 접근방식일까요?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알고 배운다>는 것은 바로 제가 사우동과 북변동의 길을 인식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지도를 펴 놓고 ‘무슨 길 몇 번’을 따로 공부할 수 있지만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주 예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분을 알고 배운다”는 것은 바로 지도를 펴 놓고 외우는 방식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 때 저절로 그 길들이 내안에 자리 잡는 <형성 formation> 되는 방식일 겁니다.

보통 영성 훈련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spiritual training> 이라는 말도 쓰긴 하지만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이 <spiritual formation>입니다. 실제로 ‘훈련’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가 formation 이기도 하고요. 즉 익히고 배우는 과정은 이렇게 <형성 formation> 되는 것입니다.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틀이 세워지고 지어져 가는 것 형성되어가는 것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잘 안다>라고 말 할 수 있겠지요.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교육의 핵심이란 무엇을 아느냐? 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 라고.

오늘 말씀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며 그 마음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품는 것이 주님을 배우는 방식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뤄질 때 그 앎이 참된 앎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등등의 신앙의 형태를 배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워서는 안 되는 일이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안에서 살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마음 안에 살면서 제가 사우동 북변동 길을 알듯이 주님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통전적으로 떠오르고 알게 되는 지식들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