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함께 걷는 봄 길 편지(3)

[드러나는 것이 더 좋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5-8)

 

<세상 끝 동물원>이라는 소설을 쓴 ‘어피니티 코나’는 1978년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작가입니다. 폴란드와 유대인 하면 우리가 금방 연상되는 것이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화장장에서 일하는 병색 짙은 유대인 여성에게 독일인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동물이야, 맞지?”

이 말은 아마 독일인 의사가 유대인을 대할 때 인간으로 접근하지 않고 ‘동물’로 접근하는 자신의 의식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그래, 나는 짐승이다”라고 말할 때, 자신이 인간을 ‘짐승’처럼 여기며 행동했던 비이성적이고 지독한 폭력성이 합리화되기 때문이지요. 즉 타자의 인정을 통한 자신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아주 폭력적인 방식입니다.

이 의사는 당시의 실존 인물인 ‘요제프 멩겔레’를 모델로 하는데, 멩겔레는 아리아인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독일 인구를 효과적으로 늘리기 위하여 유대인을 대상으로 온갖 잔인한 생체실험을 감행한, 일명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나치친위대 소속의 내과 의사였다고 합니다. 전쟁당시 수많은 잔인한 생체실험을 한 일본군 731부대와 같은 방식입니다.

요즘 바이러스 뉴스도 버겁지만 소위 <n번방> 사건은 우리 한국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뉴스입니다. 뉴스에서 주범이 얼굴을 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악마적 삶을 끝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n번방’ 주범은 독일인 의사와 같이 사이버 상에서 가해자 여성들을 무엇으로 바라보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았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움직이는 동물’로 보았을까? 또한 그 <n번방>에 함께 돈을 지불하고 참여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그 피해자들을 영상으로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중엔 양심에 가책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연민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인데 그 <양심과 연민>을 뒤로하고 화면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마음엔 피해자들에 대해서 이런 규정들을 하지 않았을까요? “너희들은 스스로 인생을 관리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거야....” 그래서 관리 못한 그들의 인생을 보며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마음들이 <n번방>을 유지 했겠지요.

자신의 삶을 악마적 삶이라 말하고 그것을 중지시켜주어 감사하다라고 말하는 사건의 주범의 모습을 보며 참 정신적으로 ‘유아적’이고 ‘소영웅주의’에 푹 빠져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객관화 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아주 추악하고 진흙탕 같은 욕망을 어떻게든 포장해 보려고 하는 근본적인 태도가 사이버상의 <생체실험>과 같은 잔인한 짓을 하게 했던 것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영의 생각>에 대해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묵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에 대해선 우리가 좀 더 집중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이 ‘육신의 생각’ 일까요? 좀 더 날선 마음으로 이 육신의 생각을 짚어 보면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스스로 <합리화> 하려는 태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는 스스로를 합리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빛 되신 그분의 빛 앞에서 가리운 것 없이 드러나는 자신을 온전히 목격하는 것이 그 덕목의 한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빛은 결국 드러난 것들을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추기 보단 드러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이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