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함께 걷는 봄 길 편지(15)

[육체의 가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 7-9)

 

고통은 그것이 정신적인 고통이든 육신적인 고통이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가늠할 수 없는 아주 괴로운 것입니다. 혹자는 육신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크다고도 하는 사람이 있지만 가시에 손가락을 찔렸을 때 아득해지는 경험을 해 본다면 그렇게 무엇이 더 크다 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편지에 쓸 정도라면 이 가시가 가져다주는 고통(통증)은 그의 삶에 자리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 듯싶습니다. 이 가시는 무엇일까요?

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그동안 발표해 왔습니다.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은 그가 젊은 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체험으로부터 유래하는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맥락상 분명히 육체적 질병을 뜻하므로 너무 확대 해석하는 면이 있습니다. 보통 안질, 간질, 편두통 등을 말하기도 하지만, 어느 학자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이 가시를 <관절염>으로 말하는 것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관절염을 앓아본 사람으로 이 “가시”라는 표현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여튼 그의 삶에 찌르는 듯한 통증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질환이 무엇이든 바울은 다른 사람은 치유할 수 있으면서도 이 질환을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 깊은 배경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울 스스로도 이 문제는 반드시 이해하고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바울에게 반문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질병은 어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치유한다고 하쇼?”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세 번이란 건 숫자적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통증이 올 때 마다 두고두고 간구했다는 말이겠지요. 어느 때, 바로 바울의 이런 간구에 주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지금 네가 누리는 그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이다. 그 약함이 비로소 너를 강하게 하는 것이다”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현재 마주하는 고통이 반드시 제거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삶의 태도를 통해 비로소 한 인간의 존재가 완성된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다.”

모든 삶이 다 처음부터 빈틈이 없고 강하고, 셀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품고 살아야 할 아픔과 고통들이 있습니다. 이는 삶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거 되어야만 하는 객관화된 대상으로 여기며 산다면 삶은 무거워질 것이고, 바울과 같이 오히려 이 아픔이 나를 더 강하게 해 라고 여기며 산다면(바울은 응답을 들은 것이지요) 고통을 자신의 책임 영역 안에 놓고 사는 사람, 즉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게 됨을 바울을 통해 보게 됩니다.

비록 육체의 가시가 없는 삶도 좋은 삶이지만 소극적으로 말한다면 육체의 가시가 있는 삶도 그렇게 나쁜 삶으로 우릴 몰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께 드릴 수 있다면요.

이 한 주간. 나의 삶의 가장 약함을 인정하며 오히려 그러기에 더 주님을 찾고, 당신을 찾는 나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5월 익어가는 ‘봄 빛’ 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