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날줄과 씨줄로 엮는 여름편지(10)

[장갑은 왜 손 모양인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보배와 질그릇, 이 조합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닙니다. 보배로 대표되는 보물이나 값진 물건은 그에 걸맞는 용기에 담는 것이 상식입니다. 보석으로 만든 결혼반지를 주방에서 막 사용하는 토기 그릇에 담아내는 그림은 누구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모양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사람을 질그릇으로 표현하며 이 세상의 어떤 보석과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이런 질그릇에 담고 있는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대해서 설명하려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그 인격이 바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보배로운 존재로 인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릇, 곧 그분을 담는 그릇을 장갑의 예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장갑의 목적은 손을 덮고 끼우기 위해서 이지요. 물론 장갑을 발에도 착용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러우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머리에는 도무지 착용할 수 없지요.

장갑의 목적은 손을 담기 위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장갑은 손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렇다고 장갑을 ‘손’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손을 담기 위해 손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 원리를 <질그릇>에 대비해 보시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생명과 영을 그 안에 담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표현하고 나타내는 모든 성품과 인격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대함은 하나님의 관대함을 담기 위한 용기(그릇)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타내는 관대함. 용맹. 지혜로움 그리고 사랑은 모두 하나님이 그 내용이시며 그 내용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에서 하나님은 이 그릇 안에 들어오시어 그분 자신으로 그릇을 채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분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사람을 만드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오실 때 그분에 의해 창조된 그릇으로 그 성품과 인격에 합당한 짝(모양)이 될 수 있는가를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 안에서 여러 가지 죄의 요소들로 인해 많은 그릇들이 찌그러졌고 굽어졌고 손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수리하는 과정이 바로 <회개>의 과정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그릇이 다시 하나님의 성품을 담기에 온전한 모양이 되었을 때 비로소 생명 되신 그분의 영이 합당한 그릇을 만나 충만하게 내재(內在)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비여!

비록 우린 질그릇과 같지만, 그 안에 능력과 신비의 영이신 하나님을 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를 묵상할수록 얼마나 놀라운지요. 샬롬!!

 

이 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