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날줄과 씨줄로 엮는 여름편지(13)

[자기를 사랑하기]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태 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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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유대인 하면 예수님에게 질타를 받았던 바리새인들을 떠올리지만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랍비여”라고 부른 것에서 보듯이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 중에 예수님을 만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진리를 단박에 깨닫고 예수님께로 들어온 사람들도 성경에 소개 되곤 하지요.

예수님과 동시대인인 랍비 힐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힐렐에게 한 이교도가 다가와 “당신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나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힐렐은 실제로는 속으로는 ‘개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있는 이교도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 스스로에게 혐오스러운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각주일 뿐이니, 가서 이것을 공부하시오”라고.

성경에도 어떤 유대인 교사가 예수님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무엇을 말하든지 비난 받게 되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한 가지를 말하면, “그러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는 비난을 준비하던 그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사랑하고, 때로는 적대적이며 원수와 같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다’ 라는 말은 한 순간의 행동으로 마치는 동사가 아닙니다. ‘사랑하다’는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처럼 애쓰는 마음가짐’입니다.

자신을 깊이 사랑한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흠모할 만한 자신을 상정하고, 그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쓸 때(이는 교만과는 완전히 다른 양태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 타인도 충분히 사랑할 만한 것이구나” 또한 이렇게 사랑받을 만한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대한 절절한 깨달음이 있게 됩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사랑이라는 기초를 통해 그 수 만 가지의 율법을 단 두 줄로 정리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사랑하기를 연습합시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민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흠모할 만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또는 수련을 통한 자기 사랑이어야겠지요.

이 수련과 애씀은 결국 사랑의 깊은 열매를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이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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