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길 위에 쓴 편지 5)

[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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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한강변을 걸을 일이 있습니다. 행주대교 부근에 차를 세워두고 강변북로를 따라 한강을 옆에 두고 걷는 길입니다. 교회 앞 산책로도 좋지만 긴 걸음을 할 때엔 끝을 마주할 수 없는 길을 걷는 것이 더 편안했습니다.

종종 자유로를 거쳐 강변북로 방향으로 차를 운전할 때에는 그 강변의 풍경이 아주 단순했습니다. 강물이 흐르고 그 옆엔 약간의 고수부지가 있고 자전거 길이 있는 모습으로 요약되었습니다.

그러나 걷다 보니 대단히 많은 민물게들이 도로에 나와 있기도 하고 많은 새들과 또 <뱀 출현>이라는 팻말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강변의 나무인 수양버들이 가득하고 또 틈새 틈새 사이로 예상보다 많은 강태공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함축된 풍경이 아니라 파노라마 같이 다양하고 열려진 풍경을 보게 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마주할 때, 4복음서 그리고 서신서 등등으로 눈앞에 서 보게 되는 글자로 쓰인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성경을 걸으면’ 아주 다양한 시대의 역사와 인물 그리고 그 배경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파노라마처럼 열리게 되지요.

예수님이 사셨던 1세기 팔레스틴 땅의 유대사회에는 유대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했었습니다. 잘 아는 전통적인 사제귀족 계급들이 중심이 된 ‘사두개인’, 전해 내려온 경전에 대한 해석을 중요시한 ‘바리새인’,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에서 소망을 발견하지 못해 메시아의 등장과 심판을 원하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에세네파’, 그리고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온다고 믿는 ‘영지주의’ 등등이 존재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약해서 보듯이 <유대인과 예수님과 제자들> 로만 보면 아주 집약된 풍경만을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분파들 속에 이제 광야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땅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예수 운동>이 나타났습니다. 성전(聖殿) 중심의 유대 사회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기에,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고 주장하며 등장한 <예수 운동>은 고루하고 답답하며 굳어져 가는 유대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 운동>은 심지어 자신이 혐오하는 원수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주장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18:21-22>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예수 운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점점 인기를 얻었습니다. 전통을 뛰어넘는 이 파도를 바리새인들이 가장 극렬히 반대하고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히브리어 동사 ‘파라슈’pāraš에서 유래 합니다. ‘파라슈’는 ‘구별하다; 분석하다’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구별과 분석의 전통을 넘어서는 시도들, 즉 하늘에 대한 이상. 계시 그리고 모든 성경의 계명을 단 두 가지, 첫째는 하나님 사랑 그리고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는 <예수 운동>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서 유대인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한 종교법을 만들게 됩니다. 그 종교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식법 ‘코셔kosher’ 입니다. 코셔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특히 외국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죠. 바리새인들에게 무슨 음식을 먹느냐는, 그 사람의 종교성과 신실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단단한 시대적 배경 안에 예수님께서는 이 단단함을 깨트리려는 듯 날카로운 정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단단한 얼음이 날카로운 작은 정으로 반으로 쩍!! 갈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1)

 

입으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표적으로 “언어, 말”이 되겠지요. 그러나 더 넓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존재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아우라(Aura)가 나오는가? ‘존재적 태도’는 그 마음 중심의 내용으로 결정되어 집니다. 만일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아우라(Aura)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아우라의 내용이 바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결정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 아우라(Aura)를 밖에 있는 요소들로 포장하고 고쳐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인 행위나 외식적인 방식을 강요를 했던 것이고요. 그러나 새로 등장한 <예수 운동>은 돌아가지 않고 바로 ‘하나님의 영’을 마음 안에 모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재 하시는 <하나님의 본질> 만이 우리가 어떠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운동, 초대 신앙공동체, 예수 공동체에 불이 붙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동안 사람을 덮고 있던 모든 거짓의 포장을 벗겨 버리고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시대가 어쩌면 1세기 팔레스틴 땅 유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분파와 주장들 그리고 심각한 바리새적인 해석들과 그 유형들이 교회와 이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기억할 말씀,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고 있는 것 보다, 지금 입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아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어둡습니다.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영’이 중심이 되어 빛이 나는 아우라(Aura)들을 가진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참 많이 찾으시겠지요. 시간 시간 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무엇인가 찬찬히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

 

이 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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