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
[사순절묵상] 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사순 3. 2월 16일 금요일
<운명 결정권자>
오늘의 말씀_디모데후서 4:1-5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3-4
1899년 미국의 특허청장이던 챨스 듀엘은 ‘발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명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발명될 게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삶을 바꾸는 수많은 발명이 계속되었고 그로 인한 변화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웃을 수밖에 없는 이 말이, 당시에는 탁견이라 여겼을 것이고 과학의 발전이 이룬 최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근래 미디어와 SNS의 급속한 발전이 놀랍습니다. 정보검색은 물론이고 상품구매, 물품의 이력 등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을 이용해 합리적인 판단과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여기는 시대가 됐습니다. 급기야 '자기 운명의 결정권자는 자신'이라 여기기까지 합니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결정은 할 수 있으나 그 결과를 감당할 만큼 성숙한가 하는 것입니다. 문명과 이기의 빠른 속도를 인간의 윤리와 성숙함이 쫓아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벌려진 간격은 혼돈과 으로 채워집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던 그때나 이제나 여전히 사람 귀를 즐겁게 하고 제 유익을 부추기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욕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길잡이 삼고 좇을만한 스승으로 삼습니다. 수많은 신 둘러싸여 그때그때 필요한 신을 택하고 절했듯 오늘날은 자신을 시킬 지식과 정보를 좇습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양심을 흔드는 것은 밀쳐둡니다. 당장의 욕구와 이익을 채울 많은 선택지가 있는데 이 양심까지 깨울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사도 바울에게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스승은 내가 찾거나 고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인생이 어떻게 스승 이 전하는 진리를 알아볼 수 있고, 눈먼 생이 어떻게 빛이며 생명이신 분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참되신 스승, 생명을 나눠주신 분의 자비로 부름 받는 것이며 그 사랑에 감싸이는 거지요. 그렇게 사로잡히는 은총을 덧입고서야 그분이 생명을 주는 분이며 참된 스승임을 알게 되지요. 바울은 그렇게 스승이신 주께 부름을 받음으로 자신에게 부여 된 명(命), 생을 걸고 행할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겐 예수님의 명(命)이 그의 목숨(命)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때를 얻든 못 얻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제 유익을 찾는 일이야 조건과 상황을 따지고 계산할 일이지만 복음은 그에 휘둘릴 리 없으니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종의 몫입니다. 거두는 것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몫이라는 거지요. 좋은 주제넘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에게 필요한 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양심을 건드리지 않는 '입맛에 맞는 말'을 찾는 시대에 복음을 듣고 그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 자체가 기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적과 같은 이 놀라운 일을 일으킬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앞장서서 걸으신 예수, 우리의 스승님을 믿고 꿋꿋이 걸어야지요.
자기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선생을 바꾸는 시절, 말씀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말씀을 골라 자기만족을 취하는 시절,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허물을 보기보다는 이웃에게 들이밀며 티끌을 손가락질 하는 시절을 사는 우리는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기도>
주님, 왕이 없어 다들 제 소견에 끌려 살았던 사사시대의 사람들처럼, 다들 제 욕망을 편들어 주는 것에만 귀를 기울이며 좋아하는 시절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복음에 사로잡혔던 첫사랑에 젖어 들게 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주장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아멘.
『사순절묵상집_곁에 머물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