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
[사순절묵상] 2024년 2월 19일 월요일
사순 4. 2월 19일 월요일
<되돌아오는 물음>
오늘의 말씀_시편 77편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라
시편 77:11-12
믿음의 여정에도 우울감이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마저 힘겹게 느껴지고 주님의 위로마저 뻔하게 들려 고개를 젓 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생생하게 다가와 심장을 뛰게 하던 말씀도 맥없는 바람처럼 지나쳐 버립니다. 인생은 물먹은 솜처럼 심연으로 가라앉고 더 이상 길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영혼은 구멍 난 것처럼 숭숭 새어 흩어지고 절망하는 이들의 탄식처럼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본 문의 누군가도 그런 시간을 겪고 있습니다.
시인도 믿음의 사람인지라 자신이 겪는 상황을 놓고 기도합니다. 상황의 무게가 무거워 웬만한 위로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욥을 찾아온 친구들이 입을 열어 위로했으나 그에게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올려도 그의 탄식은 멈추지 않고 막막하기만 하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그를 붙잡아주었던 신앙이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불면의 밤은 깊어지고 더 이상 말이 이어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믿음보다 더 높은 파도에 휩쓸리고, 삶은 영혼을 적셔준 사 랑의 감격보다 깊은 어두움으로 몰려갑니다. 파도 앞에서 당당했던 믿음은 부서지고, 어둠 앞에서 사랑은 무기력하게 느껴져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때를 만나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눈을 딱 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이 이게 전부인지, 영 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까지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는 불신앙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인의 씨름입니다. 얍복강의 야곱처럼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하는 씨름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물음은 자신을 향해 되돌아옵니다. 하나님께 여쭈었는데 어느새 자신에게 묻고 있는 거지요. 이젠 스스로가 그 물음 앞 에 오롯이 서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씨름해야 합니다. 물음은 영혼의 깊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대답을 요청합니다. 믿음은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발견하고 그 물음 앞에 서는 행위입니다. 근원적인 물음을 대면하고서야 잡다한 염려의 실타래가 맥없는 것임을 알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신 걸까? - 당신 백성을 영원토록 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은 빈말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 그분이 베푸는 은혜는 여기까지가 한계이고 하나님의 은혜도 메마르고 마는 것인가? 그 사랑은 끝난 것인가? -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사라지고 끝나버리는 유한한 것인가? 당신의 언약도 저버리시게 될 까? -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조차 이렇게 뒤집히는 것인가? 은혜 베풀기를 잊으신 걸까? - 하나님도 잊으신단 말인가? 당신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수많은 말씀은 무엇인가? 그의 노여움이 긍휼을 막은 걸 까?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자비로운 분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을 향했던 물음이 자신에게 돌아와 마음 깊이 닻을 내립니다. 남이 들려준 말은 답이 될 수 없지요. 생각해서 내리는 결론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온몸과 마음으로 묻고 답해야 합니다.
흔들림에서 시작된 물음은 영혼을 뒤흔들지만, 흔들리는 중에 되살아나는 기억은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 하셨던 과거의 기억이 묵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펼쳐집니다. 어둠은 점점 힘을 잃고 구원의 빛이 임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주님의 구원은 여전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의심으로 시작됐던 물음은 확신으로 바뀌어 갑니다. 기억은 찬양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기도>
주님,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보다 한 치 높은 파도에 흔들리는 저임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 시편 시인처럼 근원적인 물음을 품고 주님 앞에 서게 하십시오. 주께서 제 삶의 주인이심을 다시금 확신하며, 저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 주심을 찬양하게 하십시오. 아멘.
『사순절묵상집_곁에 머물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