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


[사순절 묵상] 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사순 26. 3월 20일 수요일

<하나님의 시간>

오늘의 말씀_시편 119:9-16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편 119:9

 

    말씀을 이해하려는 이가 있고, 말씀에 사로잡히길 원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합니다. 귀한 말씀이라며 감동스러워도 합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는 삶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귀로 들어 머리에는 말씀이 쌓이는데 삶은 따르지 못하니 이 간격은 조금씩 더 벌어지게 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를 향한 명(命)'으로 여긴 이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 초기에 성자라 불린 이세종 선생입니다.

    제자들은 이세종 선생이 어떻게 말씀을 대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선생은 홀로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아 말씀 한 단락을 소리 내서 읽고선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묻고는 침묵합니다. 때로는 침묵이 몇 시간이고 이어졌습니다.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네 그렇군요'라는 목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같은 물음과 긴 침묵 그리고 '네 그렇군요'라는 대답으로 하루가 채워지곤 했습니다. 선생의 긴 침묵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깨끗하게 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라는 본문의 물음(9절)은 이세종 선생의 물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화는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다고 해서 정화되지 않지요. 삶의 번다한 일들로 어지럽혀진 '탁수(濁水) 같은 마음'이 정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즉각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대증요법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흐린 것들이 가라앉기 위해서는 말씀 앞에 그저 머물러야 합니다. 나의 좋은 생각과 효과가 떠오르면, 마음은 당장 움직이라고 요동칩니다. 이때야말로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물러야 하는 때입니다. 머물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져야 세미한 그 분의 음성이 시작됩니다. 세미한 음성은 양은 냄비처럼 끓어 넘치려는 인생을 감싸며 어루만져 안정되게 합니다. 그 말씀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간곡한 권고임을 몸으로 느낍니다. 말씀에 젖어 들면, 선과 지혜인 양 여겼던 기막히게 좋은 생각의 실체와 하나님의 말씀이 분별 됩니다. 선과 지혜로 보였던 것들이 기실은 유혹임이 드러납니다. 때로는 말 씀 앞에서 고집부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말씀 앞에 머무는 시간은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정화는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드린 시간은 하나님께서 흔쾌히 쓰실 만한 것이 됩니다.

    오랫동안 묵상을 훈련한 이의 탄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해도 내 속심 저 밑바닥에 단지 1%라도 내 뜻이 은근히 숨겨져 있으면 그놈은 기어코 기어오르고 맙니다. 그래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되도록 관철하고 맙니다. 그래놓고 입으로는 마치 하나님 뜻대로 한 것처럼 떠벌리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도 사양하려 했고, 예레미야도 포기하려 했지요. 요나는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도망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더하지 싶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라고 말하고도 아버지의 뜻을 벗어나려는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뜻을 슬쩍 아버지의 뜻에 끼워 넣고 자기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분 앞에 납작 엎드려 나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이 되도록, 아버지 뜻이 나를 녹이도록 머물러야 합니다.

 

<기도>

주님, 말씀을 읽고 이해했노라 생각하고, 기도를 얼른 끝내고 내 계획을 이루려 일어서려는 이 마음을 잡아주십시오. 말씀 앞에 머물게 하시고 저를 정화시켜 주십시오. 불쑥불쑥 솟아나는 생각들이 가라앉고 당신의 속삭임이 저를 채우게 하십시오. 아멘.

 

『사순절묵상집_곁에 머물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