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


[사순절 묵상] 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사순 24. 3월 18일 월요일

<일꾼의 자격>

오늘의 말씀_고린도후서 3:4-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6/새번역

 

    예수께서 복음을 전할 때, 종교지도자들은 무슨 자격으로 그리 말하며 행하느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자격을 따지는 겁니다. 사도 바울 또한 평생 그런 자격 논쟁에 시달렸습니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최선을 다해 전도자의 삶을 살았음에도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바울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엘리트 집단에 속했었지만, 예수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에게 남은 이력은 교회의 박해자였다는 손가락질이었습니다. 다른 설교자들처럼,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받은 추천장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설교자들로부터 진정한 예수의 사도가 아니라는 부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일꾼으로, 같은 복음을 전하는 동료들에게 듣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복음을 전하느냐?'는 힐난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차라리 적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라면 교회와 그리스도를 한 영예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때론 같은 전도자들에게, 때론 자신의 전도 열매인 교회의 성도에게서 나온 것이라 힘겹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비난에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저들을 향해 자신을 굳이 변호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기도자처럼 가만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도직의 근원을 짚어봅니다. '당대의 스승 가말리엘 문하의 경력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잡힘으로만 가능한 불가역적인 전환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자 삶을 걸었던 그 열정이, 어떻게 복음의 변호인이 되고 전도자의 열정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게 결심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지요. 십자가에 달렸던 분의 생생한 음성이 아니고는 자신이 그렇게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던 율법이 낡은 언약이며, 수치와 부끄러움의 대명사인 십자가와 부활이 새 언약 의 증거이며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는 것이 과연 스스로의 사유와 추리로 가능한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봉사자의 자격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만부득이 도무지 사량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마련된 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백은 사람을 향한 논쟁이 아니라 주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직임이 아니라 살리는 직임이요, 의에 이르게 하는 직임이니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럽습니다.(9절) 상대는 논쟁하려 다가오지만 바울은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아시시의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라는 부름을 받기 전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시시의 놀기 좋아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성전 재건 후 성령께서 아시시 거리에서 외칠 것을 강권하였을 때 그는 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되겠냐고 청합니다. 자신이 어떤 인생인지 뻔히 아는 이들의 조롱이 그려졌을 것입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아시시에서 행할 것을 다시 강권하는 성령에 의지해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에 매이지 않는 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중세 유럽에서 복음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은혜로 시작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

주님, 제 삶에 더 깊이 자리하셔서 제 시작과 과정과 마지막이 되심을 일깨워 주십시오. 제 자아가 어줍잖게 일어나 다른 이에게 자격을 시비하거나 제 경륜을 은근히 내놓으려 할 때 정신 차리라고 야단쳐 주십시오. 저희의 믿음과 허락하신 봉사직이 당신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자주 서로를 용납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사순절묵상집_곁에 머물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