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


[사순절 묵상] 2024년 3월 27일 수요일

사순 31. 3월 27일 수요일

<배반보다 큰 사랑>

오늘의 말씀_요한복음 13:21-22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한복음 13:31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님의 말씀은 점점 절정을 향하고, 그분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담는 거룩한 상징들로 채워집니다. 이를 불편해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집니다. 때가 되었음을 아는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복음의 정수(精髓)를 남김없이 전합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성례전이 제정되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온전히 종노릇 하는 믿음의 길을 보이십니다.

    이런 소중한 시간 가운데 파열음이 일고 있습니다. 당신은 온몸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의 사랑을 내어주지만, 막무가내로 이 사랑을 거절 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 목숨을 내어주어도 거절합니다.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발을 씻겨 주어도 제 길을 고집하며 선생님을 외면하는 제자를 마주합니다. 주께서 고통스럽게 입을 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발을 씻겨 주고, 주께서 건네신 살과 피로 하나 되었다고 여기는 바로 이 자리에서 배반이 예고되다니요! 온전하고 거룩한 연합의 순간에 균열이라니요! 다들 침묵을 깨뜨리길 두려워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떡 한 조각을 가롯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눈앞 에서 보고도 무슨 일인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아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떡을 건네받은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 장면을 “떡을 받고 곧 사탄이 들어갔다”고 서술합니다. 예수님이 떡을 주어 사탄이 들어간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는 떡의 의미를 알면서도 유다는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그 생각은 곧바로 사탄의 의도와 합해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종교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만든 죄목인 동시에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분을 거절하고 외면한 이들로 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배신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는 하나님의 견디심이고 포용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용납합니다. ‘가서 네 할 일을 하라’ 이 말씀은 포기가 아니라 용서의 선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가룟 유다의 배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십자가로 품는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아 니라 아직도 주님의 사랑에 녹아지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자주 주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여정에서 주님과 동행하길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님을 외면하면서 내 길을 고집하는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러르고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돌아서고 외면하는, 연약한 이중성을 지닌 자신을 다시 주님 앞에 내어드리며 은총을 구하는 여정입니다. 이 모순된 마음은 ‘돌아서는 이를 품는 주님의 사랑’으로만 녹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사랑이 때로는 이 땅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거절되기 쉬운지를,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사랑과 거룩한 구원의 여정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땅의 배반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유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으로 들어갔지만, 배반의 그 자리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이 온전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인간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 랑과 영광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기도>

주님, 당신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유다처럼 가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 생각에 매여 주님을 거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런 인생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감싸 안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거절과 어리석음을 녹이시는 사랑과 십자가 앞에 더 오래 머물게 하시고 저의 비뚤어진 마음을 내어드리게 하십시오. 아멘.

 

『사순절묵상집_곁에 머물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