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컬럼


함께 걷는 사순절 편지(31)

[선한 능력에 감싸여]

전제(奠祭)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4:6-8)

 

고난 주간 세 번 째 날입니다. 주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고난이 부활이 되는 역사가 마음 가운데 잘 묵상되어지길 소망합니다.

미국의 작가인 <토마스 월트>의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똑똑한 자녀도 생겨서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꿈꾸던 자리에 오른 주인공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부푼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렸는데, 고향 땅을 바라보는 순간 당황스럽고 실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고향 마을이 너무나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독백처럼 고백합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현대인의 삶의 모습의 씁쓸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의 모든 마음과 최선을 쏟아 부은 결과가 꼭 삶의 목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험한 길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왕왕 부르는 찬양 가운데 <선한 능력으로> 라는 찬양이 기억나시지요?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의 감옥에서 죽기 한 3개월 전에 지은 가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옥 안에서 믿었습니다. 가장 좋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직감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 이 어두움 가운데 빛을 발할 것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런 신앙고백을 감옥에 남은 이들에게 종종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여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 입니다. 내가 먼저 가 기다리겠습니다.”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담대할 수 있으며 어둠 가운데 빛을 볼 수 있고 환난 가운데 그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게 되는 인생의 뒤안길에서 “끝이 아니고 시작” 임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한 사람에게 준비된 고향(본향)이 있음을 믿었던 것이고 그 믿음은 그를 이 세상에서 “선한 능력”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어 끝이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시작점을 향해 가는 사람들임을 믿는 사랑하는 생명나무교회 성도님들에게도 본회퍼와 같이 바울과 같이 본향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현재의 세대 가운데 바라보시며 오늘의 <고난과 어려움>을 잘 넘고 이기며 사는 은총이 이 고난 주간 안에 체험되시길 소망합니다.

 

돌아갈 고향을 보고 막 경주를 하고 있는

이헌 목사